Friday

#00
사실 나는 그에게 바라는 바가 제로에 가까웠다. '가까웠다'라는 표현을 한 것은, 몇 가지의 바람이 있었음과 같다. 그래서 그에게 그런 메세지를 받았을 때에도 슬픈마음보다는 억울함이 먼저였다. 나의 바람은 단순했다. 그냥 단지 먼 거리에서 소위 '롱디'를 하자고 했었다. 그가 이 곳에 온 첫 날 밤에. 서로를 우선순위에 두지 않아도,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서 유지할 수 있는 그 정도와, 먼 거리를 두고 이따금씩 만나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몇 일전의 즐거웠던 이야기, 웃겼던 일들을 서로 나누는 그런 얄팍하고, 상처는 없는 사이. 그와는 그런 사이를 원했고, 딱 거기까지가 적당한 거리라고 생각했다.

#01
많이 아팠던 후부터 돈을 크게 크게 쓰고있다. 죄의식 없이, 그냥. 평소에 비싸다고 생각했던 브랜드의 구두를 하나사고, 술집에서 한가득 술을 마시고 값을 내고, 갑자기 머리를 하고, 아까는 항공권을 예약했다. 모두 고민없이, 생각없이 하나의 행위와도 같았다. 소비를 하고 즐거움을 느낀다던가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행위였다.

#02
할 수 있는 것과, 해보고 싶은 것, 안해도 되는 것. 생각보다 사이 간격이 넓지는 않다. 사실, 해야하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

#03
하얀색 침구들을 모아 세탁소에 간다. 기다리고 돌아가고 건조되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 동안만 할 수 있는 생각들을 시작한다. 돌아가는 빨래들을 멍하니 보며,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도 한다. 그 곳에서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내 것들을 다시 챙겨 나가야 한다. 언제나 좋은 시간.

#04
얼마전에는 아침부터 흰 눈이 내렸다. 그 때 잠시 당신과 함께 이 장면을, 이 시선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우리가 있던 시간은 여름에 가까운 봄, 혹은 겨울에 가까운 가을과도 같은 것 이었기에. 잠시나마 온전한 계절의 한 중간을 함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에게 바라는 나의 몇 가지의 바람들은, 고작 이런 것들이었다.